장 4세 드 샬롱아를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 4세 드 샬롱아를레는 기욤 7세 드 샬롱의 아들이자 필리베르 드 샬롱과 클로드 드 샬롱의 아버지였다. 그는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의 조카였으며, 브르타뉴 공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부르고뉴 공작 샤를을 지지하여 루이 11세와 대립했고, 브르타뉴 공작의 수석 장관을 몰아내고 브르타뉴 공국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안 드 브르타뉴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실패했고,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가택 연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브르타뉴 공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브르타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502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샬롱아를레가 - 필리베르 드 샬롱
필리베르 드 샬롱은 16세기 인물로, 샬롱-아를레의 장 4세의 아들이자 이탈리아 사령관이었으며, 코냑 동맹 전쟁과 로마 약탈에 참여하고 피렌체 공방전에서 사망했으며, 고대 이브레아 가문의 마지막 적통 남성 후손이었다. - 오랑주 공 - 오라녜 공
오라녜 공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작위로 시작되었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네덜란드 왕실 기원이자, 현재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가 사용하는 칭호이다. - 오랑주 공 - 빌럼 2세 판 오라녜
빌럼 2세 판 오라녜는 프레데리크 헨드릭의 장남으로, 1647년 오라녜 공위와 6개 주 총독직을 계승하고 찰스 1세의 딸과 결혼하여 친영 정책을 펼쳤으나, 1650년 급사했으며 그의 아들은 훗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가 되었다. - 1502년 사망 - 아서 튜더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난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아서 튜더는 웨일스 공으로서 장미 전쟁 종식의 희망을 받았으나,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 후 이듬해 의문사하여 동생 헨리 8세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 1502년 사망 - 신승선
신승선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세종의 손녀 중모현주와 혼인하여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신수근, 신수겸, 신수영 등 3남 4녀를 두었으나, 딸이 연산군의 부인이 되면서 성종의 사돈이자 연산군의 장인이 되는 복잡한 관계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부각되어 여러 작품에서 묘사된 인물이다.
장 4세 드 샬롱아를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가문 | 샬롱아를레 가문 |
아버지 | 기욤 7세 아를레 영주, 오렌지 공작 |
어머니 | 카트린 드 브르타뉴 |
배우자 | 잔 드 부르봉 필리베르트 드 뤽상부르 |
자녀 | 필리베르 드 샬롱 클라우디아 드 샬롱 |
출생 추정 년도 | 1443년경 |
사망일 | 1502년 4월 15일 |
매장지 | 부르고뉴 백국, 롱르소니에 코르들리에 수도원 |
2. 가문
장은 기욤 7세 드 샬롱과 카트린 드 브르타뉴(Catherine de Bretagne)의 아들이자 필리베르 드 샬롱과 클로드 드 샬롱의 아버지였다. 그는 또한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의 조카였기에 프랑스의 군주와 두 차례 혼인하여 왕비가 된 안 드 브르타뉴의 사촌이기도 하다.
용담공 샤를의 이익을 지지한 장 4세는 프랑스 군주 루이 11세의 적대감을 초래하였다. 샤를의 패배와 죽음 후, 루이 11세는 장 4세의 많은 재산들을 몰수하였다. 용담공 샤를의 미망인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에게 혼인시키려던 시도는 그를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게 하였다.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의 조카인 장 4세는 막시밀리안의 권유로 브르타뉴 공국의 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브르타뉴 공작의 수석 장관 피에르 랑데의 적이었던 장은 그를 상대로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브르타뉴 공작은 그의 브르타뉴 내 재산을 몰수하였다. 프랑스의 군주 루이의 사망으로, 장은 프랑스의 새로운 섭정인 안 드 보주와 동맹을 맺었다. 그녀의 지원으로 그는 랑데를 형식적인 재판에서 여러 범죄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처형당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장은 브르타뉴 공국에서 중요 결정을 내리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고, 프랑수아에게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선 공작의 딸 안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에게 혼인시켜야 한다고 조언하였지만 프랑스는 브르타뉴를 침공하였다. 이 혼인은 프랑스 왕국과 브르타뉴 공국 사이의 전쟁을 종결할 때 맺은 조약에서 안의 혼인 결정을 가진 프랑스의 군주의 권리를 위반하였다.
장 4세는 잔 드 부르봉과 처음 혼인하였다. 이후 리니 백작 앙투안 1세의 딸인 필리베르트 드 뤽상부르와 재혼하였다.
장은 1502년 4월 8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필리베르 드 샬롱이 아버지의 자리를 상속했다.
3. 부르고뉴 지원
4. 브르타뉴 지원
장은 침략에 저항한 브르타뉴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그는 전투 후 죽은 척을 하였지만, 결국엔 확인되어 생포되고 말았다. 그는 가택 연금을 당하였지만 브르타뉴 귀환과 안이 알랭 달브레와 결혼하는 걸 막기 위해 샤를 8세에 의해 풀려났다. 프랑수아 공작 사망 후, 그는 신임 여공작의 추정상속인이 되었다. 그는 브르타뉴 최고 의회의 인물 중 한 명이였으며, 렌 사령관 자리에 임명되었다. 장은 다시 한번 막시밀리안과 안의 결혼을 시도하였으나 프랑스가 개입하였다. 장은 안과 샤를 사이의 증인으로서 혼인을 중재하였다. 그는 100,000 리브르에 브르타뉴 공국에 대한 그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고 그의 종신까지 들고 있던 브르타뉴 총사령관 지위에 다시 임용되었다.
5. 혼인과 자녀
장 4세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샬롱의 필리베르, 이름 미상의 아들, 그리고 샬롱의 클로디아가 그들이다.
6. 사망과 유산
그의 부인 필리베르트 드 뤽상부르는 조각가 콩라르 메츠/Conrad Meyts프랑스어와 조반니 바티스타 마리오토/Giovanni Battista Mariottoit에게 설화 석고 무덤을 주문하였다. 그의 무덤은 부르고뉴 백작령의 롱르소니에(Lons-le-Saunier) 코르들리에 수녀원에 위치해있다. 이곳에는 장과 그의 첫째 부인 잔 드 부르봉, 장녀 클로드 샬롱, 차남 필리베르 샬롱, 필리베르트 본인도 안치되어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